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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출신 독립·통일·민주화운동의 선각자, 김용중 선생을 재조명하다!
손녀 김성희 여사, 할어버지 김용중 지사의 누명 벗기기 위해 노력
47세에 숭실대학교 정책대학원에입문, 국제정치와 남북문제 연구
할아버지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받게 해… 큰 업적 재조명 등 노력
2020-02-12 오후 6:12:24 손광우 기자 mail kumsannews@naver.com

    미주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 독재에 항거한 민주투사로서 우리나라 현대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김용중 선생이 친북인사로 누명을 쓰고 기피되어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이역만리 미국에서 숨졌지만 유골조차 20여년 동안 고국에 들어오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귀암 김용중 선생의 기념사업회를 위해 그의 손녀인 김성희 여사가 47세의 나이로 숭실대학교 통일정책대학원을 다니면서 국제정치와 남북문제를 연구한 후 미국에 건너가 할아버지인 김용중 선생의 자료를 수집해 보훈처에 제출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게 하고 선생의 큰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에 금산출신이면서도 금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소외받았던 김용중 선생에 대해 알아보고 여성의 몸으로 할아버지와 가족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만학도의 길을 걸은 김성희 여사의 발자취와 김용중 선생에 대해 찾아본다.                                                              -편집자 주- 

                                                                                                                                      


    ▲①김용중 지사 대전국립현충원 안장식. ②김용중(歸庵 金龍中)선생 초상. ③대전국립현충원 김용중 선생  추모비.


    “내가 죽으면 뼛가루를 화장해 38선에 뿌려라! 죽어서라도 수호신이 되어 동족간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
    애국지사 김용중(1898~1975) 선생은 충남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347번지에서 태어나 1916년 18살 되던 해 망국의 한을 느껴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 민족주의에 눈을 뜨고 이듬해인 1917년 고향선배 송철 선생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송철과 함께 청과물도매상을 하며 불린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버드대학, 콜롬비아 대학, 조지워싱턴 대학, 남가주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이때 양아버지인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나라를 찾으려면 “학문을 연마해 실력을 양성한 후 이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라”는 권유에 역량을 쌓으면서 하버드 시절 보스턴 선데이에 ‘일본의 황금통치’라는 의견광고란에 기고문을 실어 일본의 학정을 고발했다.


    이어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해 1940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의 영문판 주필로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기사를 쓰면서 언론인의 길을 들어서게 됐으며, 이들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캘리포니아 리들리라는 지역에 모여 산다하여 ‘리들리 그룹’이라고 불렸다.


    상해 임시정부가 일본군에 쫓겨 해외독립운동 단체를 직접 지도하지 못하게 되자 하와이, 캘리포니아 일대 조선인단체의 연합체인 ‘해외 한국연합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워싱턴에 ‘조선문제연구소’를 설립해 ‘재미한족위원회’6인의 임시위원 및 선전과장으로 선임되어 선전·홍보활동을 시작했다.


    ▲맹호군 사열식 후 김용중 선생(동그라미 안, 1942년)과 김호, 김용성, 송헌주 등 동지들의 모습.


    신한민보 주필로 조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세계에 홍보하면서 1943년 9월‘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7년간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를 발간해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면서 수십 차례의 독립운동자금을 1919년 부터 1945년 광복 때 까지 보냈다.


    광복 후에는 1947년 6월16일 잠시 조국을 방문했으나 7월에 암살된 몽양 여운형 선생 다음 목표는 김용중 당신이라는 암살범의 말레 서둘러 출국한 후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꿈에도 고향산천을 그리던 그는 호를 귀암(歸庵)으로 지을 정도로 고향 땅을 그리워했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옵서버로 참가해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하면서 한국의 분단해소 및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으며, 1950년 5월 유엔사무총장에게 다시 한국의 중립화통일방안을 제시하며 한국전쟁을 경고하기도 했다.


    영자 월간지 ‘더 보이스 오브 코리아’를 창간하고 그 발행기관으로 한국문제연구소 설립과 동시에 라디오 방송국을 세


    워 하루에 3~4시간씩 방송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군사점령 즉시철폐 담화문 및 성명서 발표, 트루만 대통령이나 스탈린 수상에게 한반도 문제에 성의를 보이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특히 “우리 한인은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문제와 난관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호소하면서 “군사력 사용의 포기”를 선언했던 김용중 선생은 편향되지 않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1961년 1월14일에는 김일성 주석이 ’남북조선연방제안을 제시한 것을 계기로 남한의 장면 총리와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중립화 통일 방안’을 더욱 발전시킨 제안을 보내 통일 논의를 촉구했다.


    그러나 평생 미국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과 통일을 위해 활동을 했으나 중립화통일론은 남북한 당국자들에게 모두 배척당했으며, 김용중 선생은 1975년 9월6일 로스앤젤레스 남가주대학 병원에서 7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 김용중 지사 대전국립현충원 안장식 모습.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반대위원회를 주도해 기피인물로 낙인이 찍힐 정도로 권력자들에게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을 것”이라는 김 회장의 말이 설명하듯 노령에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귀국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친북인사로 홀대를 받았으며, 1975년 사망하고서도 20여년 동안 김용중 선생의 유해가 조국에 들아오지 못했다.


    평생의 대부분을 이국의 하늘아래에서 보내면서 끝가지 한국 국적을 지키면서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살았던 미주항일독립운동가인 김 선생의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화장해 뼛가루를 조국의 38선에 뿌려 달라! 죽어서라도 수호신이 되어 동족간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유골이 20여년 동안 고국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김영보 선생의 딸과 사위인 김성옥, 이태희 교수 부부의 노력으로 김용중 선생의 유골을 선산에 모시게 됐다.


    이어 김성희 회장이 미국에 건너가 콜롬비아 도서관에 있는 자료를 보훈처에 접수해 선산에 있던 유해를 절반은 DMZ 38선에 뿌리고 절반은 선산에 모셨다가 2000년 8월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손녀 김성희 회장, 할아버지 김용중 선생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47세에 숭실대학교 정책대학원에 입학

    귀암 김용중 선생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김성희 회장은 아버지 김준오(교육자), 어머니 김영보 여사 사이에서 2남2녀중 장녀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이를 발견한 부친이 7세에 김성희 회장을 피아노 교육에 입문시켰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피아노가 없던시절로 미국에 계신 할아버지(김용중 선생)께 “저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대한민국을 빛 내겠다”는 어린 손녀 김성희의 편지를 받고 그랜드 피아노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 주셔서 김 회장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금산여중고를 졸업하고 숙명여대와 경희대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늦은 나이인 47세에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누명을 벗기고 김용중 기념사업회를 운영하기 위해 숭실대 통일정책대학원에서 국제정치, 남북관계를 연구하게 된다.


    ▲ 귀암 김용중 선생의 손녀이자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성희 여사.


    대학원생 60명중 여자1명인 상황에서 학생회장에 출마한 김회장은 “전쟁이 일어나면 어머니와 아이가 제일 피해를 보는 상황에서 남북문제에 대해 어머니들이 참여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연설을 해 “1표 차이로 대학원 최초의 여학생회장이 됐다”고 말했다.


    또 “입학원서를 내는 아들을 따라 온 부모로 보았을 정도였으며, 당시 학교당국은 입학원서를 받지 않으려 했으나 교수회의에서 김용중 선생의 손녀라는 이유에서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늦게나마 공부를 마친 김 회장은 남편 임익빈의 도움으로 사재를 털어 딸 임세연과 함께 김용중 선생이 활동했던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 대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자료를 수집해 보훈처에 제공해 2000년 8월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아 절반은 38선에 절반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이외에도 경기고, 서울법대, 미국유학을 마치고 국영기업체 고위공직자로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였으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유신헌법(1975년) 비판 및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어 강제해직은 몰론 반정부 인사로 몰렸던 남편 고 임익빈의 생전 업적을 정부에 제출하여 2012년 2월6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 인사로 인정받았다.


    ▲(왼쪽부터)김성희 회장의 어머니인 금산여중고 설립자 김영보 선생과 김용중 선생의 생가.


    또 경기중학교 학생회장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정신착란을 일으킬 정도로 혹독한 전기고문으로 해방 4개월을 남기고 서거한 시아주버니 임원빈 선생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아 명예회복을 하게 해 시어머니 박립비 여사의 한을 풀어 드렸다.


    현재 김성희 회장은 “김용중 선생의 생가 복원, 기념비 조성, 문화재 등록 및 관리, 영화촬영, 사상과 생애에 대한 재조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파주 DMZ에서 오는 3월2일 김용중 선생 탄신 122주년 통일 음악회를 기획했었으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연기가 됐다”고 아쉬워 했다.


    또 “9월6일 김용중 선생 서거 45주년 추모제 준비, 분단7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선생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 금산과 서울에서 학술회의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어머니인 김영보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서울에는 김 회장이 1974년 외동딸을 위해 예원유치원을 설립(1975년)하고 금산에는 장남인 김성수 원장이 김용중 선생의 생가 일부에 예원유치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김성수 원장은 어머니를 모시려고 직장생활을 관두고 금산에 내려올 정도로 장남의 역할을 다하는 효자”라고 말했다.


    김성희 회장은 여성의 몸으로 모든 시련과 역경을 딛고 일어나 늦은 나이에 국제정치와 북한문제를 전공하고 가문(시가, 친가)의 명예를 되찾고 애국지사의 후손과 분단민족의 여성으로 한반도 평화와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고 있어 ‘어머니는 강하다’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부터)손녀 김성희 회장의 노력으로 받게 된 김용중 선생의 국가유공자 증서, 김성희 여사의 남편 임익빈 선생의 민주화운동관련자 증서. 시아주버님 익원빈 선생의 국민훈장 애족장.


    김성희 회장의 집안과 고 임원빈, 임익빈 선생의 두 집안이 애국지사의 집안이었으나 박정희 3선 독재 반대위원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만으로 김용중 선생의 유골이 20여년 동안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남편은 민주투사, 시아주버니는 애국지사였지만 그동안 그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집안의 맏딸로서 47세의 나이에 통일정책대학원에 입학한 것은 김용중 선생의 평생 동안의 외로운 독립, 통일, 민주화 운동과 견줄 만 하다고 보여진다.


    이에 김성희 회장은 김용중 선생의 생가복원, 기념비 조성, 문화재 등록 및 관리, 김선생의 사상과 생애에 대한 재조명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애국지사 김용중 선생의 고향 금산군민들의 후원과 관심을 당부하고 있다.


    한편 금산여중고의 설립한 김영보 여사는 삼남제약 고 김순기 회장과 동경유학을 같이 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 받았다.  



    <저작권자©금산소식.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20-02-12 18:12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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